발췌

캠벨 (전략) 이어서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 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 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저도 그 이미지를 소중히 여깁니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심지어는 떠나서 돌아 오지 못하게 될 경우에도 끈질기게 지니게 되는 어떤 것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사랑의 이미지요. 사람이 사람들을 처음 발견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왜 당신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캠벨 아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일곱 난쟁이를 그려낸 월트 디즈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우스꽝스런 강아지를 보세요.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겁니다.
모이어스 ‘완전’한 것은, 보고 있으면 조금 싫증이 난다, 이 말입니까?
캠벨 그럴 수밖에 없지요.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모이어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캠벨 고통이라는 거지요. 고통은 불완전한 존재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모이어스 인간적인 고통, 인간적인 분투, 인간적인 삶……
캠벨 ……거기에 그런 삶에 관한 지혜를 터득하는 젊은이가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됩니다.

성배를 하늘에서 운반해온 것은 중립적인 천사들이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천사들 가운데 가장 오만한 루시퍼는 신의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머리를 숙이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에 앞서 신은 “오직 나만을 섬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는 규칙을 바꾸어 “인간을 섬기라” 고 명령한다. 루시퍼는 머리를 숙이려고 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해석에 따르면, 그는 오만함 때문에 머리를 숙일 수 없었다. 루시퍼는 인간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이슬람 시아파의 해석에 따르면, 그는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루시퍼는 신 이외의 어떤 자도 섬길 수 없었다. 따라서 지옥의 사탄이 신을 가장 깊이 경배하는 자이다. 지옥의 가장 큰 고통은 불이나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자, 곧 신을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지옥의 사탄은 무엇에 의지할까? 그의 사랑하는 자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말했을 때의 목소리에 대한 추억이다. 루시퍼의 지옥행에 대해서 시아파는 그렇게 해석한다.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